https://www.youtube.com/watch?v=vC-eJ0Xa5xk
성경구절
사무엘상 11장 1절~15절
11장
1절: 암몬 사람 나하스가 올라와서, 길르앗의 야베스를 포위하였다. 그러자 야베스 사람들이 모두 나하스에게 "우리와 조약을 맺읍시다. 우리가 당신을 섬기겠습니다."하고 제안하였다.
2절: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희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는 조건에서만 너희와 조약알 맺겠다"하고 대답하였다.
3절: 야베스 장로들이 또 그에게 제안하였다. "우리에게 이레 동안만 말미를 주셔서, 우리가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전령들을 보내도록 하여 주십시오. 우리를 구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으면, 우리가 항복하겠습니다."
4절: 전령들이, 사울이 살고 있는 기브아에 가서 백성에게 그 사실을 알린, 백성들이 모두 큰소리로 울었다.
5절: 마침 사울이 밭에서 소를 몰고 오다가, 무슨 일이 일어났기에 백성이 울고 있느냐고 물었다. 사람들은 야바스에서 온 전령들이 한 말을 그에게 일러주었다.
6절: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사울에게 하나남의 영이 세차게 내리니,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이 말을 듣고 있을 때에,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세차게 내린, 그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다.
7절: 사울은 겨릿소 두 마리를 잡아서 여러 토막으로 자른 다음에, 그것을 전령들에게 나누어 주고, 이스라엘 모든 지역으로 말을 전하라고 보냈다. "누구든지 사울과 사무엘을 따라나서지 않으면, 그 집의 소들도 이런 꼴을 당할 것이다." 주님께서 온 백성을 두려움에 사로잡히게 하시니, 모두 하나같이 그를 따라나섰다.
8절: 사울이 그들을 베섹에 모으고 수를 세어 보니, 이스라엘에서 삼십만 명이 왔고 유다에서 삼만 명이 왔다.
9절: 기브아 사람들이 야베스에서 온 전령들에게 말하였다. "길르앗 야베서 사람들에게 가서, 내일 햇볕이 뜨겁게 내리쬘 때쯤에는 구출될 것이라고 전하여라." 전령들이 돌아가서 야베서 사람들에게 소식을 전하니, 그들이 모두 기뻐하였다.
10절: 그래서 야베스 사람들이 암몬 사람들에게 회답하였다. "우리가 내일 당신들에게 나아가 항복하겠습니다. 그때 가서 우리에게 하고 싶은 대로 하시오."
11절: 다음날 아침 일찍 사울은 군인들을 세 부대로 나누어 가지고, 새벽녘에 적진 한복판으로 들어가서, 날이 한창 뜨거울 때까지 암몬 사람들을 쳐서 죽였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다 흩어져서 두 사람도 함께 있는 일이 없었다.
종교 다원주의와 선교에 대한 정리
선교를 약화시키는 것 중에 종교 다원주의 사상이 있습니다. 모든 종교가 같다는 거예요. 형식만 다르지 결국 지류가 달라도 큰 강에서 만나고 바다에서 만나지 않냐 결국 만나는 거 아니냐는 거예요. 아닙니다, 예수님은 아버지께로 갈 자가 오직 나 외에는 없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복음의 배타성 때문에 선교가 있는 것이죠. 사도행전 4장 12절에 다른 이로서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정이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이름을 주신 적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을 알지 못한 자들에게 가서 복음을 증거 하라고. 구원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이 바로 선교를 가는 것입니다. 예배하는 자가 없기에 그곳에 예배가 없기 때문에 선교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선교가 완성이 되면 선교는 사라지고 무엇만 남냐, 요한계시를 읽어 보세요. 예배만 남습니다. 오직 하나님 예비하는 것만 남는 거예요.
그래서 여전히 우리 선교에 대해서 좀 수동적으로 생각하시거나 그런 태도를 가진 분이 계시다면, 오늘 사무엘상 11장 말씀은 바로 여러분들을 위한 말씀입니다. 왜냐면 바로 사울이 선교에 대해서 하나님 부르심에 대해서 수동적으로 반응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사울은 이스라엘의 초대 왕입니다. 그리고 이스라엘은 하나님이 택하신 제사장적 나라라고 출애굽기 19장에 하나님 말씀하시면서, '너희는 내 소유다. 그래서 이제는 너희는 모든 민족에게 나를 증거할 사명을 갖고 있다.' 이제는 그 이스라엘의 사명이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이제 교회라고 하는 새로운 이스라엘 하나님 백성들에게 그 사명이 또한 주어졌죠. 그래서 우리는 바로 하나님을 증거 하는 사명을 갖고 있는 거예요. 그 나라의 왕이 바로 이제 사울이었습니다. 지난주에 살펴본 대로 왕이 됐어요. 그런데 사울은 여전히 짐짝 가운데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사무엘의 지파들을 불러 모아다가 제비를 뽑아서 사울이 왕이 되었음을 선포합니다. 하나님이 택하신 왕이다. 자, 그다음이 이제 11장 내용이에요. 그가 어떻게 되었을까요? 왕이 되었어요. 그가 기부하라고 자기 고향으로 돌아가서 농사를 짓습니다. 하던 대로 소를 몰면서 농부로서의 역할을 다시 감당을 해요. 사울이 이렇게 하는 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 보면 '아, 참 그가 서민이다. 그가 참 겸손하다' 이렇게 말할 수 있지만 여러분, 그게 아닙니다. 사울은 '내가 왕인데 뭘 해야 할지 모르는 거야'. 그래서 그전에 왕이 없었어요. 그러니까 뭐 따라가야 될 선도 없고, 전통도 없고, 왕궁도 없고, 보좌관도 없고, 아무도 없어요. 그러니까 그냥 원래 하던 대로 농사나 짓자. 그렇게 농사를 짓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울에게 왕으로서의 사명이 부여되는 이스라엘 역사
하나님은 사울에게 농사를 더 잘을 수 있도록 기름 부은 게 아니고, 왕으로 세운 게 아니라 그에게 왕으로서의 사명. 여러분, 우리가 왕 같은 제사장입니다. 우리가 제사장적 사명을 감당하기 위해서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신 거예요. 그래서 사울은 그 부름을 받았지만 여전히 알지 못한 채 있었습니다. 자, 그런데 오늘 11장에 한 사건이 터져요. 요단강 동편에 요단 동편에 살았던 지파들이 있었고, 그 또 더 동편으로 가면 암몬 족속이 살고 있었는데, 그들이 길라 야베스라는 지역을 공에서 포위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런 위기 상황이. 발생한 거예요. 이 암몬 족속은 누구냐면, 여러분 잘 아시는 아브라함의 조카인 롯이 소돔과 고모라에 갔다가 살아남죠. 가까스로 살아남습니다. 두 딸이 살아남았어요. 함께 그 두 딸 사이에서 자녀를 낳아요. 그의 후손들이 암몬 있니다. 암몬. 그래서 이러한 어떤 역사 때문에 이스라엘 적성은 암몬을 별로 이렇게 존중하지 않았습니다. 그렇다 보니까 암몬도 이스라엘을 안 좋아했어요. 그래 서로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그래서 암몬은 늘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했었습니다. 그렇게 괴롭힘을 당하다가 사사기에 읽어보면 입다고 하는 사사가 나오죠. 입다가 바로 이 길라 출신입니다. 어이이다가 하나님의 영을 받고 어 성령으로 충만하여 이 암몬을 이기죠. 그러면서 암몬에 있었던 그 열 아 고세 되는 도시를 점령한 적이 있었어요. 이렇게 계속 서로 사이가 좋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시간이 흘러서 입다가 죽었고, 시간이 많이 흘러서 다시 그 암몬이 길라 야베스를 쳐들 온 것인데, 이길 수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항복을 조건을 하되 조약을 맺자는 거예요. 조약을 걸면서 조약을 맺어주면 우리가 암을 섬기겠습니다 이 길란 야벳 사람들이 이렇게 얘기를 하니까, 이 암몬 사람이 지도자 나하스가 참 끔찍하고도 모욕한 모욕적인 말을 합니다. 자 사무엘상 11장 2절 말씀인데, '그러나 암몬 사람 나하스는 내가 너의 오른쪽 눈을 모조리 빼겠다. 온 이스라엘을 이같이 모욕하는 조건에서만 너희와 조약을 맺겠다.' 하고 대답하였다. 끔찍한 일이죠. 고대 중동에 죄수의 눈을 멀게 하는 형벌이 있었다고 합니다. 여러분, 사사기 읽어보면 삼손이 힘을 이른 다음에 블레셋에서 끌려갈 때 눈이 뽑힌 거 아시죠. 눈이 뽑채 맷돌을 돌려 있습니다. 남유다의 마지막 시아이에 끌려갈 때도 눈이 뽑혀서 끌려갑니다. 이게 눈을 뽑는 것이 고대 근동의 말 형벌이었다고 생각해요. 또한, 고대 전쟁에서 승전국은 포로의 오른쪽 눈을 뽑았답니다. 왼쪽이 아니라 왜 오른쪽이냐? 전쟁할 때부터 왼손이 방패를 지고 오른손이 칼을 쥐는데 막을 때에 이렇게 막게 되면 왼손으로 왼쪽 눈을 가리게 되고 오른쪽은 상대방을 봐야 되거든요. 그렇게, 근데 오른쪽 눈을 빼는 것은 어떤 의미냐면 전투력을 상실하게 되는 것, 전투의 수행 능력이 이제 사라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오른쪽 눈을 빼겠다는 거예요. 그 얘기는 '너희들을 영원히 나의 종으로 삼겠다. 다시는 우리에게 대들지 못하도록 만들겠다.' 그렇게 모욕하겠습니다. 이것이 하스의 조건이었어요.
유다와 바벨로 포로, 영적 눈 덮인 이야기
여러분, 여기서 이 암몬사람 나하스의 영적인 의미를 우리가 살펴볼 필요가 있는데, 일단 암문 족속은 이 하나님의 백성들을 괴롭히고 공격하며 조롱하는 족속인데, 거기의 지도자 나하스입니다. 나하스의 의미가 뭐냐면, 이름의 의미가 '뱀'이란 뜻입니다. 성경에 '뱀'이라고 하는 것은 별로 좋은 의미가 아니죠. 옛뱀, 마귀라고 하는 이 도둑으로 불리는 이 도둑의 역할은 예수님께서 요한복음 10장에 말씀하신 것처럼 오직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는 것뿐입니다. 이것이 나하스의 영적인 의미예요. 그리고 오른쪽 눈을 빼겠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들을 뭘 상실시키겠다는 거예요, 전투력, 영적 전쟁 수행 능력을 잃게 만들겠다, 눈이 멀게 만들겠다. 오직 세상만 바라보면 살겠다. 이렇게 만들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천교도 중에 토마스 왓슨이라는 사람이 이 나하스에 대한 이야기를 하면서 무슨 얘기를 하냐면 이렇게 얘기합니다, '마귀는 사람들의 왼쪽 눈, 즉' 세상일에 대한 지식을 의미하는데 세상을 보는 것이고, 세상을 아는 지식인데 이것만 남겨놓고 오른쪽 눈을 빼버려서 경건의 비밀, 하나님과 그분의 나라의 비밀을 이해하지 못하게 만들고 만들었다라는 그렇게 얘기를 합니다. 너무 다가오는 말씀이에요.
어, 세상과 지식에 대해서 또한 정치 경제 사회에서는 우리가 알 필요가 있지만, 그러나 그것만 안다면 여러분, 그것은 무지한 사람입니다. 삼일차, 하나님에 대해서 그 나라의 비밀에 대해서 복음의 영광에 대해서 무지하다면, 그것은 이미 나하스에 의해 오른쪽 눈을 상실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돌아봐야 된다는 거예요. 왜냐면 이 뱀으로 불리는 마귀가 하는 일은 늘 사람들의 눈을 가리고 혼미케 하여서 그 복음의 영광의 빛이 비치지 못하도록 하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고린도후서 4장 4절 말씀을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시작이 세상, 신이 믿지 않는 자들의 마음을 어둡게 하여서 하나님의 형상이신 그리스도의 영광을 선포하는 복음의 빛을 보지 못하게 한것입니다. 그러므로 지금 길란 야베스의 사람들이 이제 눈이 뽑히게 될 위기에 처해 있죠.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 처하고 있는 위기라고 하는 것이죠. 그리하여 그리스도인들이 영적 전쟁을 치르지 못하고 정말 마귀에게 끌려가는 늘 죄를 짓고 그렇게 시달리며 억압받으며 마귀의 종노릇 하며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 이 나하스라고 하는 뱀의 계약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이 상태가 것이 어느 때였 바벨론 포로로 끌려가기 바로 이전에 남유다 백성들의 영적인 상태였습니다.
자, 예레미야 5장 20절입니다. 너는 이 말을 야곱의 자손에게 전하고 유다 백성에게 들려줘라. 이 어리석고 깨달을지 모르는 백성아 눈이, 있어도 볼 수도 없고, 귀가 있어도 들을 수가 없는 백성아, 얼마나 안타까운 일입니까? 마귀에 의해 완전히 시력이 가려지고 귀가 덮혀진 백성들의 상태. 그래서 그 결과는 바벨론 포로였다 것이죠. 그리고 어쩌면 이것이 지금, 어쩌면 우리들의 상태인지도 모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 최근에 무엇을 보고 계십니까? 그리고 무엇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보라고 보여주셨지만, 정말 여러분들은 그 하나님 나라의 영광을 바라보면서 결국 이 성경의 마지막 그 이야기의 끝을 보고 오늘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땅만 바라보며 그저 이따가 사라질 것들만 바라보며 하루하루 살다가 그렇게 죽어가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가 믿음의 눈으로 보지 못하고 육신의 눈으로 세상을 보려 한다면, 바로 이것이 우리가 위기에 처 있는 것이고 우리가 바로이 길라 야베스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을 알아야 된다는 거. 이것이 오늘 본문이 얘기하는 메시지 중에 하나입니다. 더 나아가서, 여전히 복음을 듣지 못한 사람들은 영적으로 보지 못하는 자들이죠. 여러분들에게 나눠드리는 이제 1층에 가시면 마가다락방 입구에 가시면 이걸 나눠 드릴 텐데, 여기에 보시면 이제 우리 쉬은 아홉 개의 선교지와 선교지 기도 제목이 쫙 나와 있습니다. 거기에 보면 국내와 국회 다 해외가 다 있는데. 지난 중에 지난주에 다녀온 충남의 한 팀의 선교지에 대한 소개에 보면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 말은, 교회에 대한 적대감은 없지만, 마을 주민 대부분이 토속 신앙과 미신을 신봉하고 있습니다. 저희가 이제 뭐 충남도 가고 곡성이 가고 여러 가지를 가지만, 거기에 여전히 토속 신앙과 미신과 우상 숭배한 사람들이 많기 때문에 복음을 받아들이거나 교회 출석하는 것까지는 마음을 열지 않는다는 거예요.
역사적 바탕과 현실을 근거로 한 나라의 신앙에 대해 탐구
그 왜 그런 것이죠? 다 속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미국에 있을 때 중미에 있는 아이티라고 하는 세계에서 가장 못 사는 나라 중에 하나인데, 그 나라에 갔습니다. 정말 정말 못 삽니다. 아이들이 진흙파이 만들어서 팔아요. 아, 진흙을 왜 먹어요. 어쨌든, 정말 못 산 나라인데, 쓰레기 더미 나라입니다. 거기에 갔더니 영화에서만 보던 부두교 주술사가 있더군요. 그니까 이제 어떤 인형을 저주를 하면 그 사람을 저주하는 거 있잖아요. 왜 그런 거 막 찔러 가지고? 어, 그 주술사들이 있고요. 실제로 가톨릭과 개신교가 들어가 있지만 사람들이 믿지만 사실 부두교를 다 믿습니다. 거의 다 혼합 종교 혼합 종교 정령을 준비하는 그것이 그 아입니다. 역사를 보면 참 안타깝게도 그 나라가 과거에 사탄에게 나라를 바친 적이 있어요. 뭐, 그래서 그랬는지 정말 그 어두운 영의 지배를 당하고 있는 그 나라인 것을 보았습니다. 눈이 있고 귀가 있어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는 이유는 바로 이 나하스라 상징되는 옛뱀이 사람들의 눈과 귀를 가리고 속이고 있기 때문에 그런 것입니다. 이 나하스가 사람들이 옳은 눈을 뽑겠다고 하니까 이 야벳의 장로들이 나하스에 제안을 합니다. 7일간에 시간을 달라는 거예요. 시간을 달라, 그 우리가 전령을 보내겠다는 겁니다. 그것이 3절입니다. 야베스 장로들이 그에게 이르되, "우리에게 이레 동안 말미를 주어 우리가 이스라엘 온 지역에 전령들을 보내게 하라. 만일 우리를 구원할 자가 없으면 내게 나아가리라." 항복하겠다는 것입니다. 근데 지금 뭘 요청하고 있습니까? 폭압과 폭력에서 위기 처한 야백 사람들은 지금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를 찾고 있는 것이죠. 구원자가 누굽니까 바로 여호와 하나님이지, 하나님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라고 지금 외치고 있는 것인데, 사실상 여기 나와 있는 선교지에 그게 남이든 그게 전남이 전북이 어디든간에 해외 든 간에 거기에 있는 사람들이 사실상 영혼들이 외치는 것이,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우리를 살려 주십시오, 우리에게 구원자를 보내 주시고 우리에게 기쁜 소식을 들려주십시오라고 사실은 외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선하고 거룩한 분노에 대한 해석과 중요성
성경에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하시는 것이 원하시는 것이 있다라고 말씀해하십니. 아, 그게 뭘까 명확하게 나오는 구절이 있는데 미가서 6장 8절입니다. 함께 읽어보겠습니다. "사람아, 주께서 는 선한것이 무엇임을 너에게 보이셨나니, 여호와께서 너에게 구하는 것은 오직 정의를 행하며 인자를 사랑하며 겸손하게 네 하나님과 함께 행하는 것이 아니냐." 겸손히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 우리가 자주 듣는 말씀이죠. 하나님과 동행하라 분명히 말씀이에요. 그거 우리에게 원하시는 거예요.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것 무엇인지, 주님과 교제하는 것, 이것이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 이전에 정의를 행하는 것이 먼저 나오고, 두 번째, 인자. 인자는 사람들에 대하여서 긍휼과 은혜의 마음을 가지고 대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정의를 행하라고 분명히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이 오늘 핵심 주제가 되겠습니다. 이 정의라고 하는 단어가 히브리 파트라고 돼 있는데, 이것은 인간을 공평하게 대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어요. 어떤 사람의 사회적 지위와 상관없이, 그 사람의 인종에 상관없이, 그 사람의 문화적 배경에 상관이 없이 각 사람에게 하나님께서 주신 그 권리를 지켜 주라는. 것이 미슈 파트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억압받고 고통당한 이들을 돌보시는 공해 놓으신 분이시고, 그것을 행하기를 우리에게 원하신다는 것이죠. 그것을 잘 표현하는 구절이 예레미야서 22장 3절 있데,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너희가 정의와 공의를 행하여 탈취당한 자를 압박하는 자의 손에서 건져 주라는 거예요. 누가요? 우리가 믿는 자들이 건져 주라 이겁니다. 이방인, 고아와 과부 차별하지 말고, 학대하지 말고, 이곳에 서 무구한 죄를 흘리지 않도록 하는 것이 나의 뜻이다. 그것이 나의 공의로운 하나님의 뜻이라고 말씀을 하는 거예. 이것이 바로 왜 사울에게 하나님의 영이 임했을 때의 분노가 동시에 터졌는지 설명해 주는 구절입니다. 지금, 하나님은 사울아, 네가 가야겠다.
지금 억압당하고 오른쪽 눈이 뽑히기 직전에 그 불쌍한 길앗 야베스의 사람들을 위하여서 네가 움직여야겠다. 언제까지 지금 갈면서 있겠냐? 그것은 농사를 짓는 사람에게 맡기고, 너는 너의 역할을 해야 된다라고, 그를 일으키고 계신 것이죠. 이것을 보고도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뜻이 아니라, 네가 지금 가기를 원한다는 거. 여러분,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 억압받는 사람들의 울부짖음과 외침을 외면한다면 우리는 이런 짓이 하는 것입니다. 세상으로 하여금 하나님이 얼마나 선하시고 위대하시고 공의로우신 긍휼히 많으신 지를 사람들이 알지 못하도록, 그들의 눈을 우리가 가리는 겁니다 이해하시겠습니까? 우리가 침묵할 때, 우리가 움직이지 않을 때, 우리가 순종할 때 사실상 우리는 그들의 눈을 가리는 것. 그런 점에서 나하스와 크게 다르지 않을 수도 있어요. 그래서 주님은 움직이라, 순종해라. 네가 가겠다고 말씀을 하시고. 그에게 이미 기름을 부으셨다는 것입니다. 그 동일한 성령이 저와 여러분들에게 부어진 줄로 믿습니다. 아멘. 그러므로 저와 여러분도 주님께서 부르시는 거예요.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을 받았기 때문에, 그 사랑의 빚진 자로서 또한 그 이웃을 사랑하기 때문에 선교한다고 말합니다. 맞는 얘기예요. 동시에 오늘 말씀에 의하면 불의를 기뻐하지 않는 것도 선교의 원동력이 된다는 것이죠. 그것이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고린도전서 13장의 사랑은 불의를 기쁘하지 않고 진리를 기뻐한다. 공의가 세워지는 것을 기뻐하는 것이 사랑이라고 분명히 말씀하죠. 미슈파트를 행하는 것이 곧 사랑이라고 말씀하고 있어요. 이것이 또한 선교라는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