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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님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다_유기성 목사 | 행11장 19-26절 | 비홀드교회 2024년 06월 09일

by 빛과 소금이 2024. 6. 9.

예수님의 마음은 사람에게 있다_유기성 목사 | 행 11장 19-26절 | 비홀드교회 2024년 06월 09일 (youtube.com)

유기성 목사님은 안디옥 교회의 사역을 통해 주님의 마음이 사람에게 있는 것을 강조합니다. 예루살렘 교회와 안디옥 교회의 차이는 예수님의 마음을 따르느냐의 문제였고, 사도 바울이 안디옥 교회에서 선교자로 급부상한 사례를 들었습니다. 또한, 주님의 마음을 품는 것은 사람을 사랑하고 용서하는 일에 연결된다고 강조하며, 예수님과 함께 살아가는 것의 중요성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으면 세상의 관점이 달라진다고 말했습니다. 주님은 풍경보다도 사람에게 관심이 많았으며, 우리도 주님의 마음을 따라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합니다.

성경말씀

사도행전 11장 19절~26절

그 때의 스데반의 일로 일어난 환난으로 말미암아 흩어진 자들이 베니게와 구브로와 안디옥까지 이르러 유대인에게만 말씀을 전하는데  그중에 구브로와 구레네 몇 사람이 안디옥에 이르러 헬라인에게도 말하여 주 예수를 전파하니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예루살렘 교회가 이 사람들의 소문을 듣고 바나바를 안디옥까지 보내니 그가 이르러 하나님의 은혜를 보고 기뻐하여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여지더라 바나바가 사울을 찾으러 다소에 가서 만나매 안디옥에 데리고 와서 둘이 교회에 일 년간 모여 있어 큰 무리를 가르쳤고 제자들이 안디옥에서 비로소 그리스도인이라 일컬음을 받게 되었더라 

 

사도행전 10,11장: 베드로와 고넬료의 이야기 

 

사도행전 10장에서 베드로가 그 이방인 로마 백부장 고넬료의 집에 가서 그 가족들에게 성령이 임하고 그들이 예수를 믿고 세례 받는 역사가 일어나는데, 그 과정도 굉장히 깁니다. 사도행전 10장을 읽어 보면 하나님이 베드로를 설득하는 과정이 굉장히 길어요. 베드로도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고 성령 받는 것이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일이었던 거예요. 그리고 사도행전 11장에 와서 초반부에 우리가 읽진 않았지만 예루살렘 교회에 베드로가 고넬료의 집에 갔던 것 때문에 난리가 났습니다. 아니, 어떻게 할례 받지 않는 그 사람들에게 가서 그들과 함께 밥을 먹고 함께 자리를 했단 말이냐. 그 베드로가 다시 한번 자기가 욥바에서 경험했던 내용을 길게 설명해요. 사도행전 11장에 아주 긴 부분이 다시 나옵니다.

 

예수 동행의 중요성에 관한 사도행전의 강조

 

자, 그 말은 무슨 뜻이었나요?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님의 마음과 전혀 달랐던 거예요. 예수님이 예루살렘 교회 안에 계셨습니다. 그런데도 예루살렘 교인들의 마음속에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순종하는 것이 한동안 안 되었던 거예요. 그래서 그들이 어디에 나가서 전도를 해도 꼭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했습니다. 안디옥에도 그랬었습니다. 처음에는 유대인들에게 전도를 했어요. 그런데 헬라 사람들이 복음을 듣고 예수를 믿는 역사가 일어나는 겁니다. 안디옥에 이 소식이 다시 예루살렘 교회에 전해졌는데 또 난리가 났어요. 세상에 이런 걱정스러운 일이란 말인가. 그래서 바나바를 보냅니다. 빨리 가서 그 도대체 이거 잘못된 거 아닌지 한번 알아보라고 보낼 정도였어요. 그게 바로 예루살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사실 사도행전의 중심 교회가 예루살렘 교회에서부터 초대가 옮겨지게 된 거예요. 어떤 중국 목회자가 저에게 그렇게 묻더라고요. 우리가 예수를 믿으면 예수님은 우리 안에 오시는데 왜 굳이 예수 동행 일기를 써야 되고, 예수 동행 훈련을 해야 되느냐. 이미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면 우리가 예수님과 동행하는 거지. 그걸 뭘 또 다시 훈련을 받아야 되냐. 그런 질문을 하셨어요. 충분히 이해할 만하죠. 네, 예수님은 이미 우리 안에 계셔요. 예수님이 우리 안에 오셨다고 저절로 예수 동행이 되는 건 아닌 거예요. 우리가 주님을 따라가는 것이 동행이니 예수님이 우리를 쫓아오셔야 되는 것은 전혀 동행이 아닌 겁니다. 그니까 예수님을 분명히 마음에 영접을 해서 구원받은 것은 분명한데, 또 예수님 때문에 교회가 세워진 것도 맞는데, 예수님의 마음과는 전혀 맞지 않는 성도도 있고 교회도 있는 거예요. 예루살렘 교회가 그런 교회였던 겁니다. 제자도 죽어야 다시 사는 길이란 책을 쓴 그렉 로리라고 하는 목사님이 그런 말씀하셨어요.

예수를 믿지 않는 이유 & 알제리 선교사이야기 

 

어떤 사람이 예수님을 믿지 않는다면 두 가지 경우라는 겁니다. 주변에 예수를 믿는 그리스도인이 없거나, 또 하나는 주변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있기는 한데 그 사람들을 너무 잘 알거나 인데  참 마음 아픈 이야기죠. 그 예수를 믿는 사람이 전혀 없으니까 전도해 주지도 않으니까 예수를 믿지 않는 경우도 있고, 예수를 믿는 사람을 또 너무 잘 알아요. 그러니까 예수를 믿을 마음도 안 생기는 경우도 있다. 이게 정말 안타까운 일인 거예요. 예수를 믿는다고 다 예수님과 마음이 같은 것이 아니고 이것이 지금 현재 너무 자연스러워졌다. 신혼 여행을신혼여행을 아프리카 알제리로 다녀온 여전도사님이 계세요.. 야 알제이도 신혼 여행지로 괜찮은가 보다. 혹시 그렇게 생각할까 봐 설명을 드리고 싶은데, 알제리 선교사님이 한국에 오셔서 이제 아기를 출산을 했는데 이제 알제리로 다시 가셔야 되잖아요. 아기가 났으니까. 근데 큰 아이도 있고 이제 막 출산한 아기도 있고 둘 다를 데리고 알제리로 가기가 너무 어렵죠. 근데 그 전도사님이 마침 결혼식을 하게 됐어요. 그래서 그 전도사님이 그러면 우리 신혼여행을 알제리로 가자. 그 남편도 참 귀해요. 그러자. 그래서, 가지고 그 아기를 데리고 그 선교사님과 함께 알제리로 갔던 거예요. 참으로 정말 귀한 전도사님이었고, 그 전도사님이 알제리를 갔다가 와서 제게 편지를 보내줬어요. 참 마음이 아프더라. 알제리로 갔더니 거의 대부분이 회교도들이었어요. 왜 이렇게 회교도들이 되었나. 알리를 130년 동안 프랑스가 있었습니다. 프랑스는 여러분도 다 잘 알다시피, 거의 기독교 국가죠. 근데 그 130년 동안 얼마나 프랑스가 알제리에 못되게 했는지 독립하던 그때 그 프랑스 사람들이 세웠던 모든 예배당을 다 회교도 어 그 회당으로 다 만들어 버렸어요. 그 이야기를 알에 갔다 와서 쭉 하시더라.

바나바와 안디옥 교회: 성령충만하고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인물

 

예수를 안 믿는다고 할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또 다 예수님의 마음을 가지고 사는 것은 아니라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는 예루살렘 교회와 분위기가 완전히 달랐어요. 우선, 이방인들에게 마음이 열려 있었고, 교회 안에 이방인들이 많았고요. 바나바가 안에 와서 보니까 교회 이방인들이 참 많은 겁니다. 근데 바나바가 크게 기뻐했다 그랬어. 그걸 보고 크게 기뻐했다. 예루살렘 교회에서 파송 나왔지만, 바나바는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래서 그걸 보고 너무 기다. 야, 헬라 사람들도 예수를 믿는구나. 이미 사실은 예수님이 벌써 예언하셨고, 지금 이 시대는 사실 다 전 세계는 모든 교 그때 당시 개념으로 보면 다 이방인 교회예요. 우리도 그 이방인 교회입니다. 그때 예루살렘 교회 기준으로 보면 이런 시대가 올 것을 예수님은 다 알고 계셨고, 그렇게 기독교 역사를 이셨어요.. 그랬으니 그때 당시 예루살렘 교회 또 교인들을 보시는 주님의 마음이 얼마나 답답했 우리가 생각하면 정말 말이 안 되는. 예수님의 마음을 그대로 품고 있었던 거죠. 24절에 보면 바나바는 착한 사람이요, 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사람이라. 이에 큰 무리가 주께 더하지 바나바를 소개하기를 성령 충만했던 사람이라고 말하는데, 그 말은 성령 충만한 사람은 예수님과 마음이 같습니다. 어떤 사람을 성령 충만하다고 말해야 하는 거죠. 뭐, 방언을 하거나 또는 여러 은사가 나타나는 일도 아이. 사람이 정말 성령의 충만한 사람이구나 분별할 기준이기도 하지만 진짜 중요한 핵심은 예수님의 마음이 그 사람의 마음인 거예요. 그 이런 사람을 볼 때, 성령 충만하다. 그런데 바나바가 그랬다는 거예요. 바나바가 아주 특별한 케이스인 것은 설명을 드려서 아마 여러분들도 이해하실 거예요. 예루살렘 교인들은 전혀 그런 마음이 아니었는데, 바나바는 이방인들이 예수를 믿은 걸 보고 너무 기뻤다. 주님의 마음과 바나바가 하나였다는 거죠.

안디옥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의 이야기

26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에서 처음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을 얻습니다. 기독교인들이 우리는 지금 다 우리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인 하지만 그 이름을 처음들은 데가 안디옥 교회예요. 그 안디옥 교회 당시에, 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름은 지금 불리는 것과는 조금 의미가 다릅니다. 약간 빈정거리는 모욕적인 별명이기도 해요. 예수에게 미친 사람, 그 맨 예수 이야기만 하고 맨 예수님만 바라본다. 그러고 주님이 계신다. 그러고 완전히 저 사람들이 예수에게 미친 사람이야라고 하는 조롱섞인 별명 의미가 더 강했어요.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그 안디옥교회 교인들은 늘 예수님 예수님 하고 살았던 거죠. 그리고 실제로 예수님께서 그들과 함께 계셨어요. 지금 우리가 매일 일기를 쓰고 주님 바라보고 주님과.. 친밀히 동행하자고, 고 예수 동행 운동을 이렇게 할 때 조금 그런 느낌을 받아요. 저 사람들은 조금 이상한 사람이야. 저도 너무 지나치다는 표현을 종종 듣습니다. 

안디옥 교회: 예수님의 존재를 느끼는 공동체 

 

근데 성경을 가만히 읽어 보면 그냥 말로만 예수님, 예수님 했던 게 아니었어요. 21절에 보면 주의 손이 그들과 함께 하시매 놀랍지아요. 그 안디옥 교회는 주님의 손이 함께하심이 분명했던 교회였어요. 그니까 교인들이 예수님을 볼 수는 없었지만 주님의 손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분명히 느꼈어요. 주님이 진짜 그 공동체 속에 계셨어요. 수많은 사람들이 믿고 주께 돌아오더라 그랬어. 교회로 오더라, 아니에요,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 교회로 오더라. 그럴 수 있죠, 뭐 표현이. 근데 어떻게 기록했죠? 주께로 오더라, 주님께로 왔다고 표현하고 있어. 23절에 보면 모든 사람에게 굳건한 마음으로 주와 함께 머물러 있으라 권하니. 그러니 안디 교회는 기본적으로 눈에는 보이지 않으시지만 예수님께서 정말 그들과 함께 계셨음이 생생했던 교회였어요. 이것 때문에 예수 동행 운동을 하고 있는 거예요. 왜냐면 지금도 똑같으니까. 주님은 지금도 우리와 함께 계세요. 우리가 그 주님을 알든 모르든 우리가 예수님의 마음을 실제로 품고 있든 그렇지 못하든 주님은 우리와 함께 계세요. 그 주님은 우리가 주의 마음을 품지 못하면 답답해하시고 근심하시고 우리가 주님의 마음을 품으면 기뻐하시는 그 차이가 있을 뿐이에요

안디옥 교회와 세계 선교의 중요성

 

27절에 보면 안디옥 교회가 흉년을 만난 예루살렘 교회에 헌금을 구제금을 모아서 보냈다는 기록이 나옵니다. 아주 의미심장하지 어느. 교회가 어느 교회를 돕는 교회가 되었다는 말은 중심축이 바뀌었다는 거예요. 안디옥 교회가 이제는 세계 선교의 중심축이 되면서 하나님께서 안디옥 교회에 여러 가지로 역사하시고 힘을 주시고 복을 주셨다는 뜻이죠. 그러니까 예수님의 마음을 그냥 가지고 있는 게 아니고 그 마음을 품고 순종하는 일이 너무너무 중요한 거예요. 비드 교회가 아직은 정말 교회 세워지는 초창기 교회입니다. 그러나 안디옥 교회처럼 어떻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주님께 순종하는 교회 되기를 축복합니다. 아멘. 그리고 그렇게 교회를 함께 시작한 우리 여러분들이 여러분 자신도 어떻게 서든지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사역이 힘 쓰시기를 축복합니다. 그게 잘 되는 길이에요.. 지금 우리 시대에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성도, 예수님의 마음을 품은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2009년에 인도네시아에 선교사 수련회를 인도하러 갔었어요. 그때 인도네시아 각지에서 선교사님들이 수련에 오셨는데 선교사님들 이야기를 들으면서 깜짝 놀랐어요. 어느 여성 교사님 한 분은 싱글 선교사님이라 자카르타에서 한 시간 반 비행기를 타고 가서 거기서 배를 또 타고 14시간 들어가 그런 섬 지역에 가서 사역하시는 선교사님. 그 선교사 수련회 때문에 그 길을 따라오신 거죠. 참, 어떻게 이런 분이 있을 수 있나. 왜 소형문 선교사 부부는 99.9% 강성 이슬들이 사는 그 마을에 들어가서 사역을 하는데 선교사 신분이 드러나면 그냥 밤중에 누구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그런 지역에 가서 사역을 하세요. 어느 선교사님은 이 회교 무슬림 신학생이 밤에 강도로 위장을 하고 들어와서 폭행을 한 그런 일을 경험한 이야기도 하시더라. 도대체 이런... 상황에서 계속 선교하시는 것이 가능한가, 그런 생각이 드는데 선교사 수련에 끝나고 다 또 자기 임지로 가시더라. 인도네시아에 있는 사람들을 사랑하시는 주님, 그 마음을 지금도 품고 그렇게 선교도 하시는 거예요. 이 안디교회만 아니고 지금도 똑같아요. 우리와 함께 하시는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사람의 영혼을 귀중하게 여기는 주님의 마음을 품게 하시는 거예요. 그래서 선교에 대한 마음이 간절한 교회가 있고, 그렇지 못한 교회로 갈라지는 거죠. 성도들도 마찬가지고 선교는 전적으로 예수님의 마음을 품을 때, 주님의 마음을 품을 때 우리 안에 일어나는 이해할 수 없는 마음이에요. 사람이 일반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냥 일반적인 정서가 아닙니다.

목사님의이야기:전도에 대한 깊은 깨달음

전도 열심히 하시는 어느 목사님이 저희 교회 선 목적에 오셔서 간하 때, 그때 집 앞에 있는 술주정뱅이 알코올 중독자 집에 전도하러 가셨던 이야기를 하신 적이 있습니다. 전두 대원들과 같이 갔는데, 솔직히 너무 실해요. 전도를 열심히 하시는 분이에요. 근데 이 중독자게 한번 이렇게 붙잡혀서 말이 이제 대화가 되면 저어도 한 세 시간 이상은 했던 말 또 듣고, 했던 말 또 듣고 들어야 되는 그분이 그런 분이에요. 그니까 전도를 나가긴 하지만, 오늘 저녁은 죽었다 이런 생각이 들고. 그날따라 신방 일정이 너무 많아서 몸도 너무 피곤하고, 그런데 그 사람이 없는 거예요. 그날 그 뭐 전도 대원들은 너무 안타까워하는 목사님은 마음이 너무 좋더. 전도하러 나가서 전도 대상자가 없는 게 너무 좋아서, 그날 일찍 집에 가서 쉬셨는데, 그다음 날 새벽기도 때 주님의 책망을 들은 겁니다. 그날 그때 전도 나갔던 그때 이야기를 주님이 말씀하시기를 '너는 어떻게 목사의 마음으로 전도하 내 마음으로 해 지 그 고을' 하시면서 더라고요. 주님이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저도 그 목사님 간증을 들으면서, '아, 내가 목회를 목사 마음으로 하는 것도 이것도 잘못이나.. 목사 마음으로 목회하는 것도 주님이 기쁘시죠 않을 수 있어요.' 빌립보서 2장 5절에 '너희 안에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 이미 우리 안에 예수님의 마음이 있어요. 문제는 그걸 내가 품느냐 아니냐 하는 거 차이가 있는.' 여기서 우리의 삶에 주의 역사가 갈라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목사나 설교자가 아니라도 다. 우리는 주님의 마음을 품어야 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 안에 예수님이 와 계시니까. 그러면 사람이 달리 보여요. 예수님의 마음을 품었을 때 나타나는 가장 놀라운 현상이 사람이 달리 보이는 겁. 예수님이 보시는 눈으로 사람을 보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지 아십니까? 내 마음으로 보는 것과 예수님의 마음으로 보는 게 완전히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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